
아이를 살리려는 행동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걸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그런 상황을 떠올려 보지 못했습니다. 2026년 1월 개봉한 영화 슈가는 실화를 바탕으로 그 질문을 정면으로 던집니다. 신파일 것 같아 반쯤 경계하며 앉았는데, 오히려 억지 눈물이 없어서 더 오래 마음에 남은 영화였습니다.
1형 당뇨, 이 병이 다른 이유
야구 연습을 하다 갑자기 쓰러지는 12살 동명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병원에서 의사가 "평생 인슐린 주사를 맞아야 합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미라보다 제가 더 멍해졌습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졌습니다.
동명이 진단받은 것은 1형 당뇨(Type 1 Diabetes)입니다. 여기서 1형 당뇨란 췌장의 베타세포가 자가면역 반응에 의해 파괴되어 인슐린을 거의 생성하지 못하는 질환을 말합니다. 흔히 생활 습관과 연관된 2형 당뇨와는 전혀 다른 기전의 병으로, 아이도 어른도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게 찾아올 수 있습니다. 완치 방법이 없으며, 환자는 평생 외부에서 인슐린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국내 1형 당뇨 환자 수는 약 3만 명 수준으로 추정되는데, 전체 당뇨 환자 중 극히 일부에 해당합니다(출처: 대한당뇨병학회). 시장 규모가 작다 보니 의료 기기나 치료제 개발에서도 후순위로 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화는 바로 그 구조적 공백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특히 저혈당 쇼크(Hypoglycemic Shock)의 공포는 영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저혈당 쇼크란 혈당이 급격히 낮아져 의식을 잃거나 경련을 일으키는 응급 상황으로, 수면 중에도 예고 없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저도 숨이 조여드는 느낌이었습니다.
엄마가 코드를 짠 이유
신파 영화라면 아마 미라가 울면서 기도하는 장면을 넣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미라는 퇴근 후 노트북을 열고 코드를 짭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라는 직업이 설정을 위한 설정이 아니라, 캐릭터의 본능적인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장면이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낀 건, 그 장면이 "대단한 엄마"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수 있는 걸 다 하는 사람"을 보여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라가 해외에서 직접 들여온 것은 연속혈당측정기(CGM, Continuous Glucose Monitor)입니다. 연속혈당측정기란 피부에 작은 센서를 부착해 하루 24시간 실시간으로 혈당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장치입니다. 기존의 채혈 방식처럼 매번 손끝을 찔러 혈액을 채취할 필요 없이, 5분 간격으로 혈당 수치를 보호자 스마트폰에 전송할 수 있습니다. 채혈 공포가 있던 동명에게 이 기기는 단순한 편의 이상의 의미였고, 가족 전체의 불안 수준을 완전히 바꿔놓는 장치였습니다.
미라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호자가 원격으로 실시간 혈당을 확인할 수 있도록 시스템 연동까지 직접 구현합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저는 기술이 사람을 구하는 가장 조용한 방식을 목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창한 발명이 아니라, 내 아이가 자는 동안 혈당이 떨어지는 걸 미리 알 수 있도록 알람을 연결하는 일. 그것만으로도 이 가족은 처음으로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게 됩니다.
선의가 범죄가 되는 순간
이쯤에서 영화는 방향을 틉니다. 미라의 사연이 환우회를 통해 퍼지면서 같은 상황의 부모들이 찾아오고, 미라는 연속혈당측정기를 직접 수입해 보급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법 의료기기 밀수 혐의로 고발당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진짜 소리를 낼 뻔했습니다. FDA(미국 식품의약국, Food and Drug Administration), 즉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다는 미국 의약품 규제기관의 정식 허가를 받은 기기를 국내 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범죄로 모는 구조가 너무 어이없었습니다. 제도가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절차를 지키기 위해 환자가 희생되는 건지 묻고 싶어졌습니다.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의료기기법상 품목허가 절차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품목허가란 의료기기가 국내에서 제조·수입·판매되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안전성과 유효성을 인정받는 법적 절차입니다. 해외에서 이미 허가받은 제품이라도, 국내 허가를 별도로 받지 않으면 판매나 보급이 불법이 됩니다. 이 원칙 자체가 잘못됐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문제는 속도입니다. 희귀질환 관련 기기처럼 국내 시장성이 낮은 제품은 허가 신청 자체가 늦어지고, 그 공백 동안 환자들은 제도 밖에 남겨집니다.
영화가 이 지점을 신파로 처리하지 않고 사회 고발 드라마의 결로 유지한 것은 분명 잘한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그 덕분에 분노가 흩어지지 않고 오래 남았습니다.
제도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영화 후반부, 남편 준우가 미라에게 "부모 잘못도, 아이 잘못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결국 눈물이 났습니다. 그 말이 위로가 아니라 사실 확인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1형 당뇨는 예방도, 예측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그 사실 앞에서 얼마나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환우 가족들의 연대와 사회적 공감이 모이면서 결국 관련 법 개정과 제도 개선으로 이어지는 결말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만큼 현실에서도 실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다만 이 과정이 영화에서 다소 빠르게 마무리된 점은 아쉬웠습니다. 제 경험상 제도가 바뀌는 과정은 훨씬 더 길고 지저분한데, 그 부분을 더 천천히 다뤘더라면 한국판 에린 브로코비치가 됐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알아두면 좋은 맥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1형 당뇨는 자가면역 질환으로, 생활 습관과 무관하게 발병합니다
- 연속혈당측정기(CGM)는 현재 국내에도 허가된 제품들이 있으며, 일부는 건강보험 급여 적용이 되고 있습니다
- 희귀·소아 질환 관련 의료기기는 국내 허가 공백이 여전히 존재하는 분야입니다
- 이 영화의 실제 모티브는 한국1형당뇨병환우회 김미영 대표의 실화입니다
희귀질환 분야에서 의료 기기 접근성 문제는 국내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럽의약품청(EMA) 역시 소아·희귀질환 분야의 의약품 및 의료기기 허가 촉진을 위한 별도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출처: 유럽의약품청(EMA)). 제도의 속도가 환자의 생존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문제는 전 세계가 공통으로 안고 있는 과제입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런 영화가 오래 기억되려면 그냥 보고 끝내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형 당뇨가 무엇인지, 연속혈당측정기가 왜 필요한지, 제도의 공백이 실제로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조금 더 알고 가는 것, 그게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솔직한 응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관람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의학적 또는 법률적 조언이 아닙니다. 1형 당뇨와 관련된 치료 및 의료기기 선택은 반드시 전문 의료진과 상담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나무위키 – 슈가(영화) : 줄거리 핵심 흐름, 연속혈당측정기 연동 내용, 불법 의료기기 고발 경위, 실화 모티브(김미영 대표) 확인